“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22:1-2)
신경림의 수필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제목만으로도 정겹습니다. 비슷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동질감이 있기에 서로 더 의지할 수 있고 서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둘람 공동체는 가진 것 없고 잘난 것이 없기에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지만 어디에도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 없습니다. 결국 블레셋 근방에 위치한 아둘람굴에 머물게 되는데 굴은 도피 생활의 비참함과 절망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중에는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있었지만 그들에 이어서 다윗을 추종하여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환란 당한자. 빚진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사울의 통치 아래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사울 왕에게서 민심이 떠났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다윗을 통한 새로운 통치가 시작될 것을 나타냅니다. 누가 보더라도 오합지졸같고 사회의 낙오자 집단의 모임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다윗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받아주고 이해받을 수 있었기에 다윗을 참 목자로 기대하며 모여든 것입니다. 다윗도 나 하나 살기도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그래도 자신을 의지하겠다고 모여든 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아픔과 고난을 겪어 보았기에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다윗에게로 몰려든 것입니다.
아둘람 공동체를 묵상하면서 교회를 떠올려봅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아둘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울타리가 낮아야 합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 당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들, 삶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 용납되고 이해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을 통해서 참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여 회복하고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지 않았나 돌아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아둘람 공동체가 되기 보다는 이 땅에서의 가진 자의 여유를 부러워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저마다 꿈꾸는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 온통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세상에 살면서 거기에 물들어서 고상하고 세련된 크리스천으로 보이고 싶어합니다. 행여 어딘가 좀 모자라고 못난 부류로 취급되지 않으려 늘 경계를 하고 그래서 점점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야 편안함을 느끼는 모임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어떠한 사람이 오더라도 주안에서 환영받고 용납받으며 복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아둘람 공동체를 꿈꾸며 서로의 약함과 허물도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넘치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