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삼상 6:12)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로 인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재앙을 당하자 다시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려 합니다.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그들의 제사장들과 복술가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조언을 합니다.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 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블레셋인들이 모세 율법에 의거한 속건제의 개념을 이해하고 따랐다기 보다는 단순히 불법으로 취한 물건에 대한 ‘배상’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을 통치하던 수장들의 수효대로 금으로 만든 종기의 형상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서 법궤를 보낼때 같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그들에게 나타난 재앙은 쥐가 퍼트린 ‘페스트(pest)’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궤와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실을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젓 나는 소 두마리를 끌어다 수레에 메웁니다. 아직 짐을 메어 보지 못한 소를 택한 것도 그들 나름대로 신에 대한 예우나 경외심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말못하는 짐승이지만 소에게도 모성애가 있기에 새끼와 떼놓을 경우 본능적으로 새끼에게 가려고 할 것입니다. 블레셋인들이 이렇게 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소의 본성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 여호와로 인한 것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9절)’ 벧세메스는 에그론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진 이스라엘의 성읍입니다. 암소는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갑니다. 그런데 가면서 웁니다. 아마도 집에 갇힌 송아지들은 어미 소가 그리워 울었을 것이고 어미 소들은 송아지의 울음 소리를 듣었을 것입니다. 모성적 본능때문에 그렇게 울면서도 무언가에 붙들린듯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가는 소들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그 소들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에 무사히 도착해 임무를 마치면 번제로 드려질 운명이었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우리는 인생의 진정한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자꾸만 뒤를 돌아볼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오직 강권적인 붙드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위해서, 오직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